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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고서] 홀 - 편혜영

category 책과 글자들 2017. 8. 21. 17:36


홀 The Hole - 편혜영

배반자이자 거짓말쟁이 속물의 예민한 곱씹음



저자 이름을 발음할 때 드는 편한 느낌은 1도 없는 이야기.

인생이 한 순간에 허물어진 존재의 이야기. 몸 안에 갇힌 영혼. 안타깝다 못해 깝깝한 이야기다. 읽으면서 자주 책을 덮어야 했다.


끔찍한 사고 후에 마비된 몸을 가지고 살아남은 남자의 의식을 보는 이야기다. 

작가의 서술로 말해보자면,


“어떻게 삶은 한순간에 뒤바뀔까.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아내가 방금 책에서 읽은 것을 천천히 얘기했다. 한 남자가 간발의 차로 죽음의 위기를 면한 이야기. 어느 날 바로 제 앞으로 공사 중인 건물에서 건축 자재가 떨어져 내리고, 그 순간 사고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았기 때문에 비로소 뭔가를 생각하게 된 사내 이야기였다.”


그리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무사할 테고, 어떤 일이 있어도 저 너머로 홀로 가지 않겠다고 얘기했다. 섣부른 이해 없이 아내를 슬픔에서 천천히 건너오게 하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들었다.”



처음엔 아내가 죽고 자신은 살아남은 전신마비된 불쌍한 남자의 이야기인 것 처럼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자신이 어쩌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당한 짐짝취급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면서 서서히 장모에게 위협을 받는다. 미저리가 연상되는 스릴러 상황이다. 과거의 현재가 교차하며 주인공 오기가 생각만큼 불쌍하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가족과 친지들에선 어느 하나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내라는 여자는 차갑고 이성적이고 속을 모르겠다. 메마른 아내의 부모와 똑같이 혐오스럽다. 그 혐오는 결국 남편에게서 기인한다는 걸 알게 되어도 너그러워 지지 않는다. 시점때문인지 오기가 성공한 것도 괜한 잘못인 것처럼 느껴진다. 티비에 나오는 스타강사고 정교수직까지 오른 것이 낙오된 아내에 대한 배려없는 파렴치한 일인 것 처럼 느껴지게 한다. 아내처럼 실패하고 그럭저럭 간신히 살았어야 옳았던 것처럼. 어쩌면 오기는 처음부터 남을 이해 못하는 무심하게 상처주는 인간이었나보다. 하지만 그를 뭐라하기엔 아내도 속물이다. 아내는 그냥 막연하게 뜨고 싶은 인물, 뭔가 성취하고 싶지만 자꾸 실패하는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그냥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인물일 수도 있다. 다들 성공은 하고 싶지만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게 대부분이니까.


어쩌다가 운 좋게 성공을 했는데 대학에서 정치 싸움으로 남을 밟고 올라간 바도 있다. 다른 여자에게 집적거리고 외도도 했다. 덤덤하면서도 섬세하게 심리를 기술해도 하여간 골자는 그거다. 속물. 기이하게 뒤틀린 심리에 컴플렉스를 가진 장모라는 인물과 둘이 남았으니 상황이 그에게 곱게 돌아갈 리가 없다. 회복의 기미를 보이는 그의 몸 상태와 점점 속도를 높여가는 장모의 복수 행위가 한껏 긴장을 높인다. 결국 그는 아내가 그렇게 열심히 파들어가던 깊은 구멍에 굴러떨어져 그럼에도 아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옛일을 반추하고 있을 뿐이다.

욕망의 덩어리고 배반자에 속물이자 거짓말쟁이. 

홀-구멍의 의미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정갈한 문체가 좋았다. 냉랭하다. 상황을 이야기하고 바로 그 근거를 댄다. 무신경한 속물이 서술하는 상황이 이렇게나 예민할 수가 없다. 아이러니다. 주인공은 이름부터가 싫은 느낌을 준다. 성도 없이 오기. 나머지는 사람들은 변변한 이름도 없다. 제이라든가 케이라든가 엠이라든가. 이니셜도 아닌 한글로 부르는 영어 대문자. 장인 장모 아버지. 그냥 배경 대상들이다. 세팅.


한 번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작은 책자인데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되게 안넘어가는 것은 한 장 한 장이 쓰리고 무거워서다. 색다른 감각을 느끼고 싶은 분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극중 아내가 말한 추리소설이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인 줄 알고 영화를 봤는데 그와 같은 상황은 안나오더라. 소설에서만 기술되나.


몰타의 매, 제리 브로턴의 욕망하는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