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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고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앤드루 포터

category 책과 글자들 2017. 8. 18. 16:01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앤드루 포터

The Theory of Light and Matter - Andrew Porter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슬픔,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차분하고 서늘한 이야기들. 미국 고학력 중산층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명문대학을 다니고 의사, 변호사, 대학 교수를 직업으로 하는 인물들이 주로 등장한다. 먹고 사느냐 못사느냐로 드라마틱해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인물들의 감추어진 맨얼굴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들이 흘러간다. 겉보기엔 잔잔하나 속은 급류가 흐르는 강처럼.


눈이 마주치면 상냥히 웃고 입발린 소리도 잘하고 가끔 어안이 벙벙할 만큼 자신감을 보이는 스테레오 타입 미국인(?)의 잔잔한 일상에 숨어있는 격렬한 사건들을 태연히 그려낸다. 그래서인지 가끔 훅 들어올때 문단을 다시 읽어봐야 할 때도 있다.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난거야?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를 읽은 때문인지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현재 사건에 서술하는 방식에 익숙해졌다. 앤드루 포터는 몇 군데에서 그런 식으로 기술한다. ‘코네티컷’,’피부’에서 우리는 멀리 미래의 비극적인 일을 알고 있는 채로 현재를 본다. 그러한 대비가 가져오는 효과는 극적이다. 시간순으로 기술하는 이야기들을 주로 읽어서인지 ‘아 문학이라는 게 이런것도 가능하지 참’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참 희한하게도 빛은 파동이면서 입자이다. 파동을 관찰하게 될 때는 입자의 운동을 볼 수 없다. 입자의 궤적을 볼 때는 파동을 관찰할 수 없다. 마치 헤더의 선택과 같이. 빛의 이 아이러니한 행동은 아주 아주 흥미롭다. 그 불확정성이라는 말이 주는 미묘한 느낌이 매력처럼 느껴지니. 아니, 내가 물리학을 포기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이 단편은 참 아름답다. 인물들이 가식이 없다. 헤더는 그렇게 약게 굴지는 못했다. 그저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의 상식에 따라서 행동했을 뿐이라고 변명을 해 본다. 일탈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도 딱 무 자르듯 나눠질 수 없는 복잡한 것 아닌가. 로버트와 나눈 부분들은 콜린이 절대 이해 할 수도 없고 나눌 수도 없는 부분이다. 헤더라는 존재가 가지는 입자와 파동 성질처럼. 

결국 평정심을 잃고 터져나온 오열에서 헤더는 외면하려고 했던 자신의 진심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호주판 커버>



작가는 재미있게 글을 쓸 줄 안다. 사건들이 범상한 듯 범상하지 않다.  작가는 글의 마지막 부분을 굉장히 강렬하게 마무리하는 특징이 있다. 담담히 가다가 슥 주제를 알려주는 느낌이랄까. 짧지만 굉장히 놀라웠던 ‘피부’를 보라.


‘코요테’, ’아술’, ’폭풍’은 결핍된 가정에서 일어나는 강렬한 사건들을 그리고 있다. 서서히 인물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던 영향이 어떤 일을 계기로 수면위로 떠오른다. 그러면서 이전의 사건이 지금의 그들의 모습을 지어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인과관계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불확정성에 더 가깝다.


인간에게는 바삐 하루하루를 지내느라 돌아보지 못한 마음의 흠집들이 있다. 이런 책을 읽고 있으면 일상적인 생각을 잠시 멈추고 그 흠집을 살피게 된다. 그것을 들여다 보는 것은 흥미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덕분에 예전에 봤던 연극 ‘코펜하겐’을 다시 읽어 보고 싶다. 작가가 좋아한다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레이먼드 카버, 존 치버, 리처드 포드도 읽어 보고 싶다.